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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봉선사 큰법당 - 남양주시 봉선사 / 대웅전현판이 「대법당」인가?

by favoritegoods 2025.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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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봉선사 큰법당

고려광종 20년 969년에 승려탄문이 운악산의 밑단에 절을 창건하여 운악사라고 부른 것이 봉선사의 전신이라고 전해진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다. 용문사, 현등사, 수종사 등 80여 개의 사원을 마사한 경기북부 최대 사원이다.

 

조선세종 때 이전 7종을 선교양종에 통합하면서 이 절을 혁파했지만, 1469년(조선례종 1년) 정희왕덕윤씨가 광릉 세조를 추모하고 89사이에 중창해 봉선사로 했다. 왕의 어머니인 정희 대비가 죽은 남편의 세조 연을 운악산으로 바꿔 ‘광릉’이라고 하며 이 절을 세조의 명복을 비우는 사원으로 선왕을 받는다는 의미로 봉선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레종은 친필의 현관을 시사했다.

 

1551년(명종 6년)에는 문정왕후에 의해 교종의 중심이 된 사원으로 지정되어 여기서 승과를 받거나 전국 스님과 신도에 대해서 교학을 진흥하는 중추적 기관의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과 병자 호랑이 때에 소실한 것을 1637년에 복구해 수축했다.

 

당시 봉선사의 현판은 예종이 직접 썼다며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남양주 봉선사 동종을 같은 해 주조했다고 한다. 1550년(명종 5)에 선교양종 속에서 종교의 수사찰로 지정되어 전국의 승려와 신도에 대한 교학진흥의 중추적 기관이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에 전소되어 이듬해인 1593년 주지낭이 중창했다. 1636년(인공 14)에 병자 호랑이로서 다시 사라진 것을 1637년에 주지계민이 중창하고, 1749년(영조 25)에는 재초가 중수했다.

 

1790년(정조 14)에는 나라에서 전국사찰을 관할하기 위한 고규정소를 설치했을 때 봉선사는 함경도 일원의 사찰을 관장했다. 1848년(헌종 14)에는 화주성암과 월성이 중수하고, 1902년에 도성내의 원흥사를 수사찰인 대법산으로 당시 이 절은 16개의 중법산 중 하나로 지정되어 경기도의 전 사원을 관할했다. 1911년에 사찰령이 배포되었을 때는 31개 산 중 하나가 되어 교종 오모토야마로 지정되어 교학진흥의 주역을 담당했다.

 

1926년에는 잘 알려진 월초가 대웅전과 비사채를 중수하고 삼성각을 신축했다. 그러나 6·25전쟁에서 법당 등 14동 150동 건물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 후, 1959년에 화효가 범종각을 세우고, 1961년부터 1963년까지 운경과 능가가 운하당을 세우고, 1970년에는 주지운하가 대법당을 중건했고, 1977년에는 월운이 영각을 세웠다.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에는 대법당, 삼성각, 개건당, 방적당, 운하당, 범종각, 청풍원, 요사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대법당은 대웅전과 같은 법당으로 한국에서 처음으로 한글 현판을 진행한 것이다. 법당 사방의 벽에는 한글 호화경과 한문 ‘호화경’을 동판으로 새겨서 이상하다.

 

문화유산에는 1963년의 보물로 지정된 봉선사의 동종을 비롯해 1903년에 그려진 칠성 탕화, 사원 입구의 보운당 부도 등이 있다. 그리고 대법당 앞에는 1975년에 운하가 스리랑카에서 모셔져 온 불사리 1과를 봉안한 5층탑이 있으며, 1981년에는 운하의 무도탑을 세웠다.

 

500년 세월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고목 일주문과 부도전을 지나 경내에 들어가면 입구에 큰 느티나무 한 개가 서 있다. 이 나무는 500여년 전 정희왕후가 남편 세조의 명복을 빌리기 위해 봉선사를 중창한 뒤 심었다고 전해진다. 봉선사와 광릉 숲의 500년 세월을 묵묵히 지켜보고 서 있다.

 

1969년에는 주지운하(虘虛, )가 대법정 등의 법정을 중건했다. 경내에 납골당이 있고 연못이나 카페 등이 있기 때문에 가족 단위로 많이 방문하는 곳이다. 약사 여래 불상에 신도들이 직접 금박을 하고 기도하는 개금불사가 진행 중이다. 봉선사는 매년 7월 연꽃축제로도 유명합니다.

 

특이한 사항으로 봉선사는 보통 사원에서 대웅전의 기능을 하는 전각의 현판이 다른 사원과 달리 한글에서 단지 대법당이 되고 있다. 그리고 기둥에 걸린 주련도 모두 한글이다. 이 현판과 주련의 문장은 서예가인 봉봉(雲峯) 김인석(금인석: )의 작품이다. 한국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선두에 섰던 운하님이 서예가 금인석에게 물어 쓴 것이다.

 

봉선사를 재건한 운하는 성전의 의지만 알면 됩니다만, 성전을 보기 위해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이 굳이 한문을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이것에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많이 했다.

 

이런 운하의 의미로 한국의 사원 가운데 처음으로 한글 현판이 탄생했고, 여기서 더 대법당은 주연에도 한글을 사용한 것은 물론, 내부에도 화엄경과 법화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동판으로 새겨 벽면에 붙였다. 6·25전쟁에서 탄 법정은 철근콘크리트를 만들지만 전각의 전통성을 잘 표현하고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봉선사 일주문에는 ‘운악산 봉선사’라는 한글편액이 방문자를 맞는다. 한 주문을 보면 이전 ‘운악산 봉선사’ 한글 편액과 뒤에 ‘정종본찰 봉선사’라는 한자 편액을 볼 수 있다.

 

한 주문만 봐도 본선사는 불경한 한글 역경사업의 중심도량임을 알 수 있다. 일주문은 삼문에서 4개의 석주를 일렬로 세운 것은 흔들리지 않는 수행으로 삼독심을 버리고 깨달음에 이르는 삼해장문을 표현했다.

 

대법당 서쪽 언덕에는 1926년에 건립된 삼성각이 있다. 6·25 전쟁을 견뎌낸 산령각, 북두각, 독성각은 한 지붕 아래 세 가족처럼 일각으로 야마신, 칠성, 독성을 모셨다. 가난했던 시대, 초가운데 부모님을 맞아 아내와 함께 살던 정이 매장된다.

 

처마선풍판 안쪽에는 청룡이 강력하게 날아가 운악산 백호가 긴 꼬리를 흔들면서 늠름하게 봉선사를 지키고 있다. 북두각에는 결가부좌 지성관 여래가 금륜을 왼손에 들고 인간의 수명과 복락을 관장한다. 호쿠토 칠성은 칠색으로 바뀌고 중생을 살려 지성관 여래 좌우에는 햇빛 보살과 달빛 보살이 연꽃 위에 태양과 달을 가지고 있다. 원유관 위에 흰색 점으로 별을 표시한 칠원성군이 있다.

 

전체적으로 고려와 조선의 양식이 혼재하고 있어, 상부에는 정사각형의 윤곽과 보살을 교대로 배치해, 하부에는 강희정이 세웠다. 정남종이 문장을 쓴 장문이 새겨져 있다. 또한 종 입구 위쪽에 넓은 띠가 있지만 그 중에는 당시 유행했던 물결 모양이 사실적으로 잘 표현되었다. 종의 어깨에는 이중의 횡선을 돌려 몸통 부분과 구분하고 있고, 종 안은 굵고 가는 삼중의 횡열을 당겨 몸통 부분을 상하로 나누고 있다. 사방의 4곳의 연못에는 각 9개씩 36개의 연꽃 봉오리가 두드러져 밀교의 37존화를 형상화했다. 연못 사이에는 4명의 보살이 서 있고, 그 아래에는 육자 대명왕 진언, 퍼지옥진언을 범어로 새겼다. 아래에 중첩된 파문은 고통의 바다를 건너 대피하러 가는 것을 보여주었다. 고려시대에 비해 종 입구가 펼쳐진 모양과 몸통에 있는 횡대와 조각수법 등은 조선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면에서 그 특징이 잘 나타난 중요한 종이다.

 

평생 세계에 부처의 말을 들려주는 종 범종각에는 예종의 극단적인 효심이 느껴지는 보보종이 있다. 종종에는 1469년 조선시 문서화 4절에 꼽히는 최고의 문장가 강희면의 글이 새겨져 있다. “범종이란, 화도 수행 기구의 제일 처음이 되는 것으로, 그 소리가 장대하고, 위에는 하늘 위에, 아래에는 지옥까지 미쳐 육도에 들린다. 색계 18천의 하늘 아가니타왕까지 이 범종이 크게 울리고, 불법이 크게 일어나므로, 지금, 범종으로 하루 6회 경계하면 악도에 윤회하는 것을 멈출 뿐일까. 반드시 광릉에 크게 울려 문득 부처님의 지혜를 더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산이 평지가 되어 바다가 마을의 땅인 이 공덕은 드디어 없어지지 않는다”며 봉선사 중창의 공덕을 찬양했다. 또 이 범종의 목소리로 세조대왕이 깨달음을 이루고, 28중생세계(지옥, 악축생, 인간, 욕계 6천, 색계 18천)가 윤회를 멈추고 극락에 이르도록 발원했다. 이처럼 새벽에 28회 범종을 치는 것은 28중생 세계에 부처님의 말씀을 들려주기 위한 것이다. 세조사 후에 개척한 광릉의 부속사찰 봉선사 옆에 있는 잘 광릉의 숲이라는 여기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세조다. 봉선사는 세조사 후에 개척한 광릉의 부속사원 성격의 절이다. 유교 국가였지만, 왕에 따라서는 불교에 사후 세계에 의지한 경우가 많았다. 광릉은 본디 왕가의 사냥터이자 군대의 훈련장이기도 했다. 그 후, 세조의 능인 광릉이 만들어져 철저하게 보존되고 관리되고 있다.

 

지금의 봉선사는 1970년대 당시 주지였던 운하님 주도로 이루어진 대대적인 중창 불사였던 것이다. 봉선사의 역사는 시련의 연속이었지만, 그때마다 승려와 불자들은 유적 속에서 사원과 숲을 오토기처럼 시작하여 지키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봉선사 주지였던 난헤스님의 이야기도 그 중 하나다. 봉선사에 진을 붙인 왜군은 광릉과 일대의 숲을 훼손했다. 왜군은 퇴각하면서 절과 숲에 불을 붙였고, 이때 봉선사는 대부분의 전각을 잃었다. 난헤스님은 왜군이 방화를 저지르자 대웅전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독경을 시작했다. 불상과 함께 죽을 각오였던 것이다. 왜군은 독경의 소리가 멈추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낭혜의 의연이 봉선사와 숲을 살린 것이다.

 

하루하라 이광수가 봉선사에 갔던 이유는? 봉성사는 하루하라 이광수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이광수가 속세의 운하와 동갑에 8촌 친척이라는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친일 이력 때문에 해방 무렵에 갈 곳이 없었던 이광수를 거둔 사람이 운하였지만, 배려를 해 주었다. 이광수는 사눈에서 1944년부터 1948년까지 살았지만 해방 직후 1946년에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운하의 도움으로 봉선사에 들어가 은거했다.

 

춘원 이광수는 일제강점기에 불교문학의 초석을 새긴 인물이다. 1922년 이시노지에서 <화엄경>, 1923년 금강산에서 <호화경>, <금강경>, <원각경> 등 불경을 읽고 불교에 심취해 <이차동의 죽음>(1935), <꿈>(1938), <무명>(1939), <사랑>(1939), <원효 대사>(1942) 등 많은 불교 관련 소설을 집필했다. 해방이 되면, 하루하라는 운하님에 의지해 체재해, 요전날의 친일 협력에 대한 자비의 돌 베개를 끊었다. 하루하라는 <이시베쿠>의 서문에서 “나는 오랫동안 세계를 떠나 수도 생활을 할 생각으로, 꽤 크고 장엄한 결심을 가지고 봉선사에 갔다”고 했다. 춘원은 불행히도 북쪽으로 끌린 뒤 1950년에 삶을 마쳤다.

 

한편 일반 대중에게는 가수 유현상이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린 장소로도 유명하며, 가왕 조용필도 첫 결혼식을 올린 장소이기도 하다.

 

*참고자료 : [봉선사 홈페이지] [목위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불교신문] *방문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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